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문단 편집) === 불행한 말년 === 나폴레옹이 축출되자 부르봉 왕가의 재건을 위하여 노력했지만 그 와중에 벌인 백색테러로 인망이 좋지 않았고 민심을 잃었기에 결국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 남편 루이 앙투안, 조카 샹보르 백작 앙리와 같이 프랑스에서 쫓겨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Henri_dArtois_by_Adeodata_Malatesta.jpg|width=500]] 샹보르 백작 앙리는 샤를 10세의 손자로, 샤를 10세의 [[차남]]이자 마리 테레즈의 시동생인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의 아들이었다. 앙리는 1820년 어머니의 눈앞에서 아버지 베리 공작이 공화파에게 암살당한 그 해 [[유복자]]로 출생했다. 자식이 없는 마리 테레즈는 시조카 앙리를 친아들처럼 돌봤다. 7월 혁명으로 인해 샤를 10세가 퇴위하자 계승권 순서상 마리의 남편 루이 앙투안이 자칭 '''루이 19세'''로서 20분 간 형식적인 즉위식을 수행하고 --20분 국왕 체험-- 직후 조카인 앙리에게 자리를 넘겨줬다. 그래서 샹보르 백작 앙리는 [[앙리 5세]]라고도 하지만 정식 대관식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 후, [[루이필리프]]가 자신의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즉위해서 실제 재위했던 기간은 며칠 밖에 안되기 때문에 앙리 5세라고 잘 불리지도 않는다. 마리 테레즈는 그 후 [[오스트리아 제국]], [[양시칠리아 왕국]], [[영국]]을 떠돌면서 살아야 했고 남편 루이가 1844년 죽은 뒤, 결국 오스트리아에서 폐렴에 걸려 유일하게 남은 부르봉 왕가 친척 앙리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72세. 불행한 인생을 살았지만 정작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했다. 다만 정작 부르봉 왕가의 왕들은 루이 14세부터는 나름 장수한 편[* 루이 14세('''77세'''), 루이 15세(64세), 루이 18세(68세), 샤를 10세('''79세''')]이다. 마리 테레즈가 사망한 후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후예가 된 샹보르 백작 앙리는 더 비참하게 홀로 여러 [[유럽]]을 떠돌면서 눈칫밥을 얻어 먹어야 했다.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퇴위하고 [[파리 코뮌]]이 들어섰지만 이를 [[아돌프 티에르]]가 진압했다. 앙리는 이 때 프랑스로 돌아가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지만 티에르를 대통령으로 한 제3공화국[* 제1공화국은 1792년 [[프랑스 혁명]]으로 들어선 공화국, 제2공화국은 1848년 10월 혁명으로 [[루이필리프]]가 퇴위하고 들어선 공화국이다.]이 들어서면서 된 프랑스에서 내쫓긴다. 이후 프랑스 내각은 [[입헌군주제]]를 생각하면서 그를 군주로 받아들일 것을 염두에 두기도 했으나 앙리는 마리 테레즈의 영향을 받아 전제군주제의 옹호자였고, 과거의 [[절대왕정]] 체제와 선을 긋긴 했으나 그와 동시에 '내가 태어났을 때 요람에 놓였던 부르봉 백기를 국기로 재지정하지 않으면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그 기회를 스스로 내쳤다. 앙리는 이후 평생 프랑스 입국을 금지당했다.[* '''이 때가 프랑스에서 자발적으로 군주제를 복고할 마지막 기회였다.''' 부르봉 왕가 내에서 정통파와 오를레앙파 간의 다툼이 앙리를 우두머리로 하고 그 후계를 오를레앙파인 파리 백작 필리프로 정하게 되면서 해소된 데다, 당시 '''제3공화국의 의회 구도가 왕당파 의원들이 과반수를 훨씬 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앙리가 오를레앙 왕가를 굉장히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 왕당파의 패착이었다.] 이 시기에 이르면 확고하게 왕당파를 지지하며 부르봉 백기만을 국기로 인정하던 방데 지방조차 삼색기를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세월이 많이 지났고 혁명의 성과물이 프랑스라는 근대 국가에 모두 반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모두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앙리는 이 때문에 프랑스의 공화주의자들에게 프랑스의 [[조지 워싱턴]], 즉 공화국의 개국공신이라는 비아냥성 찬사를 받기도 했다. 결국 앙리는 떠돌이로 지내다가 1883년 [[프라하]]에서 병으로 쓸쓸하게 죽는다. 그가 후사를 얻지 못한 채 사망하면서 부르봉 왕가의 직계 혈통은 완전히 끊기게 된다. 이렇게 [[부르봉 왕조|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직계는 단절되었고 방계 혈통을 추적하면, [[보르본 왕조|스페인계 부르봉 왕조]]의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프랑스어로는 루이 드 부르봉.]이 명목상 루이 20세를 자칭하고 있다. 루이스는 [[알폰소 13세]]의 차남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의 손자로 현재 스페인 군주인 [[펠리페 6세]]의 육촌인데 [[프란시스코 프랑코|카우디요]]의 외증손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거기다 제2왕족인 부르봉-오를레앙 가의 후예 장 도를레앙(장 4세)[* 루이 필리프 1세의 7대손이다.]과 프랑스 부르봉의 정통이라고 서로 논쟁 중인 데다가, 보나파르트 가문의 장 크리스토프 나폴레옹(나폴레옹 7세)[* 나폴레옹 1세의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의 현손.]까지 합세해서 세 가문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펠리페 5세]][* [[보르본 왕조]]의 초대 왕이자 [[루이 14세]]의 손자이다.]의 4남인 [[필리포 1세(파르마)|펠리페]]를 시조로 한 부르봉-파르마 가문까지 가세한다면 어떻게 될 지 모른다.[* 사실 부르봉-파르마 가문은 펠리페 5세와 더불어 앙리 5세의 누나 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의 자손이기도 한지라 혈통상 제일 정통성이 있고, 더욱이 [[부르봉파르마의 공녀 지타]]가 오스트리아 황제 [[카를 1세]]의 황후로 그의 지원도 있어서 [[1차 세계대전]]이 다르게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 모른다. --[[페르디난트 1세(불가리아)|루이필리프의 외손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를 일이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